"텍스트 파일이 우리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왜 학습교재가 텍스트 파일로 보급돼야 하는지 비장애인들은 잘 모를 것입니다."
윤성태(41)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시각장애인 동호회 회장이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그는 현재 방통대 교육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다. 원래는 이번 학기를 끝으로 졸업할 예정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물론 사연이 있다.
'4년'이라고 무심히 말할 지 모르지만, 윤 회장을 비롯한 시각장애인 학생들에게 4년은 쉬이 지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다른 학생들이 강의 내용을 필기하고, 개강파티를 하고, 중간고사를 대비하는 시간이 윤 회장에게는 교재와 악전고투를 벌이는 시간이다.
"교재를 텍스트로 변환하고 나면 이미 중간고사 끝나"

"시각장애인 학생 1명이 교재 1권을 맡아 희생하는데요. 책을 나눠 타이핑을 맡기고 이를 다시 모으고 나면 중간고사가 이미 끝나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정상적인 학습이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방통대 시각장애인 동호회 학생들은 4년여 전부터 '수업교재를 txt 파일로 변환해 시각장애인에게 제공해 달라'고 학교 출판부에 줄기차게 요청해왔다. 출판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작권법에 위배된다'는 게 이유였다. 동호회는 다시 요구했다. '저작권자가 교수들이니, 이들에게 동의를 구하면 합법적으로 변환해 배포할 수 있지 않느냐'고. 출판부의 답변이 돌아왔다. "교수님이 너무 많아 일일이 동의를 받을 수가 없어요." 윤성태 회장은 "어차피 같은 양식의 공문으로 한꺼번에 뿌리는 일인데, 뭐가 어렵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대학 출판부는 교재를 txt 파일 대신 mp3 음성파일로 제작해 주겠다고 입장을 바꿨다. 동호회측은 거절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쓰는 화면낭독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그 기계적 합성어로 녹음된 mp3 파일을 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mp3 파일은 단어검색도 안 되고, 읽고자 하는 대목으로 곧바로 이동하는 기능도 없어요. 그걸로는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협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대학 출판부에는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았다. 합법적인 시위에 나섰다. 지난해 8월 12일부터였다. 시각장애인에게 txt 파일로 된 교재가 얼마나 절실한지, 이를 변환해 제공하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알리는 동영상 CD를 제작해 노트북에 담아 교내에서 틀기 시작했다. 매주 화·금요일이면 서울 혜화동 방통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학교측은 관할 경찰서에 선집회 신고서를 내는 방식으로 맞불을 놓았다. 그렇게 시위장소를 '빼앗겼을' 땐 동영상 CD를 트는 식의 '설명회'로 대체했다. 올해 6월까지, 10개월을 그렇게 보냈다.
고충처리위 중재로 올 2학기부터 PDF 파일 제공 시작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교육인적자원부, 문화관광부, 국가인권위원회,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립특수교육원 등 알 만 한 기관이면 모두 민원을 넣었다. 결국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중재로 올해 6월 대학 출판부와 간담회를 갖고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출판부로부터 디지털 저작권 보호(DRM) 기능을 넣은 pdf 파일로 교재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올해 2학기에는 수강신청한 과목에 한해 우선 pdf 파일을 공급받았다. 순차적으로 모든 책을 pdf로 변환해 시각장애인이 공부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는 합의도 이끌어냈다. 여기까지가 윤성태 회장과 동호회원들이 거둔 '작은 승리'다.
윤성태 회장은 "지금의 pdf 파일만으로도 상당히 많이 개선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시각장애인들에겐 오랫동안 이용한 txt 파일이 편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pdf 파일은 나름의 장점이 있다. "단어검색도 txt 파일과 유사하게 되고, 그림도 들어 있어요. 또 화면 확대가 가능하니까 약시인 장애인도 책을 읽을 수 있거든요. 많이 좋아진 겁니다."

이에 대해 윤성태 회장은 "방통대의 변화가 선례가 돼, 다른 학교에서도 장애인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다양한 방법이 보급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2년 모교인 숭실대를 상대로 '교육권을 침해받았다'며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지체장애인 박지주 씨의 사례를 들었다. "선례가 하나인 것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소송을 강행하는 이유다. 이 소송을 위해 그는 졸업논문을 일부러 내지 않고 학교에 남기를 자청했다.
장애인 용품 대여 제도 마련돼야
국내 웹사이트의 정보접근성 문제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전자정부의 시각장애인 전용 페이지는 없느니만 못합니다. 차라리 기존 웹페이지에 장애인을 위한 기능을 덧붙이는 게 나은데요. 웹페이지에 알트텍스트(그림설명)와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단축키만 넣어줘도 웹페이지의 95%는 접근 가능합니다. 그나마도 시각장애인을 위해 많이 개선된 것이지만…."
그러면서 손에 든 점자단말기를 슬몃 꺼내들었다. "이게 점자 자판으로 txt나 점자용 bbf 파일을 만드는 단말기인데요. 한 대에 520만원이에요. 화면의 텍스트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스크린 리더만 해도 100만원 정도인데요. 우리나라 장애인이 400만명이라고 하는데, 이 비싼 걸 일일이 구입해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외국처럼 우리나라도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용품을 저렴하게 대여해 주는 제도가 있었으면 합니다."
방송통신대의 올해 2학기 등록자수는 13만여명. 이 가운데 장애인은 900여명에 이르고, 그 중 130여명이 시각장애인이다. "우리도 남들처럼 PC로 공부하고 싶다"는 이 '0.1%'의 외침은 정말 터무니없는 요구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