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봉천동 1680-29호. 빛바랜 건물들 사이로 들어앉은 아담한 4층 건물의 3·4층에 조그만 배움터가 둥지틀고 있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배움의 터전 '여명학교'다. 

여명학교는 일반 중·고등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거나 한국의 또래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새터민 아이들을 돕고자 설립된 비영리 대안학교다. 뜻 있는 교회와 활동가들, 교사들이 힘을 모아 지난 2004년 9월 첫 수업종을 울렸다. 

여명학교 누추한 공간에 정규 학교로 인가받지 못한 비인가 시설이지만, 여명학교 역시 어엿한 학교다. 개교 첫 해, 24명의 학생이 알음알음으로 학교문을 두드렸고, 이 가운데 10명이 같은 해 졸업식에 참석했다. 3살을 맞은 올해엔 30여명의 탈북 청소년들이 학교삼아, 놀이터삼아 드나들고 있다. 중3 나이인 16살 청소년부터 26살 '늙다리 학생'까지 나이 터울도 다양하다.

게시판에 붙은 시간표에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일정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학급은 중등과정(1반), 고등과정(2반), 대입과정(3반) 등 3반이다. '심리치료'나 '오카리나'처럼 일반 중·고등학교에는 없는 독특한 수업도 눈에 띈다. 

이 가운데 매주 금요일은 컴퓨터 수업이 있는 날이다. 교사는 박미영 선생님. 한글과컴퓨터의 방문 IT교육 브랜드인 한컴CQ교실의 안양·평촌지사 소속 컴퓨터 교사다. 

한글과컴퓨터는 사회공헌활동의 하나로 지난해부터 여명학교의 컴퓨터 수업을 지원하고 있다. IT기업이란 특성에 맞는 사회공헌활동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여명학교와 인연이 닿아 컴퓨터 10대와 관련 SW, 강사와 교재 등을 지원하게 됐다. 수업 첫 해인 지난해에는 박미영 교사를 포함해 2명의 선생님이 수업을 번갈아 진행했는데, 올해엔 박 교사가 도맡아 3반 30여명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매주 한컴CQ교실 교사 방문해 수업 진행

학교를 방문한 날은 마침 그래픽SW인 포토샵을 이용해 사진을 변형하는 수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자, 우선 포토샵 프로그램을 열고 각자 사진을 불러오세요." 박 교사의 말에 마우스를 놀리는 아이들 손놀림이 바쁘다. "선생님, 이거이 왜 이런대요?" "모양을 선택하기 전에 먼저 '래스터'를 설정해줘야 해요." 아이들의 질문과 박 선생님의 대답으로 좁은 교실이 금세 왁자지껄해진다.

아이들도 곧잘 컴퓨터에 재미를 붙이는 모습이다. 수진이(가명)는 홍미영 선생님이 한 번만 설명했는데도 금세 자기 얼굴사진을 하트 모양으로 꾸미고는, 박 선생님이 다른 학생들에게 신경쓰는 동안 옆자리 '딱친구'(단짝친구)에게 방법을 일러준다. "저마다 수준차가 제각각이라 일일이 챙겨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땐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쳐주곤 한다"며 박 교사는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북한에서 PC나 인터넷을 거의 접해보지 못한 학생들에게 컴퓨터 수업은 결코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이곳 아이들은 일반 학생들보다 컴퓨터를 접할 기회가 적습니다.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학교에서만 컴퓨터를 접하다 보니, 지난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잊거나 과제를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 처음 배우는 학생들은 생소한 컴퓨터 용어때문에 어려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박미영 교사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명학교

그러다 보니 수업은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천천히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미영 교사는 "교육 첫 해인 지난해에는 컴퓨터 초보자들이 많아 윈도나 인터넷, 카페나 미니홈피 개설과 운영 등의 기초과정을 주로 가르쳤다"며 "한글과 엑셀, 파워포인트 등도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한다. 

해를 넘긴 지금은 나름의 '고수'도 꽤 나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컴퓨터 게임도 곧잘 한다"고 박미영 교사는 귀띔한다. 그러고 보니 쉬는시간에 교실 이곳저곳에서 미니홈피를 들락거리거나 고스톱 게임에 푹 빠진 아이들이 눈에 띈다. 

"뜻 있는 기업·교사 동참해 달라"

아침 9시에 시작된 수업은 오후 3시를 넘겨야 끝이 난다. 3개 학급을 번갈아 가르치려면 토요일 한나절을 고스란히 바쳐야 한다. 박미영 교사는 뜻 있는 선생님들의 동참을 기다린다고 한다. "교재나 컴퓨터 등 하드웨어 측면에선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만, 혼자서 가르치다보니 아무래도 아이들 하나하나를 챙기기엔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참 순수한데다, 선생님을 무척 잘 따르는 편이라 보람을 많이 느껴요. 다른 선생님들도 참여해보면 큰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조명숙 여명학교 교감선생님도 "성장기 청소년인지라 컴퓨터에 관심 많은데다 외로운 아이들일수록 커뮤니케이션을 원하는 경향이 짙다"며 "컴퓨터를 통해 친구도 만나고 미니홈피나 메일로 소통하면서 다들 굉장히 좋아하고 배워하고 싶어한다"고 소개했다. "비슷한 교육기관이 몇 있지만, 우리 학교 컴퓨터 수업이 시설이나 수업내용 면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자랑도 덧붙였다.

여명학교 그럼에도 역시 재정 문제는 이들 학교의 지속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여명학교도 몇몇 교회의 자발적 지원과 모금운동 등으로 꾸려나가기는 하지만, 성장기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쾌적한 환경에서 교육하는데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현행 제도로는 정규 교과과정으로 인정받을 길이 없어, 이곳 학생들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34만원의 생계비도 받지 못한다. 이는 아이들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여명학교는 내년초께 대안교육시설 인가를 위한 국회청원을 준비중이다.

다른 IT기업들의 도움의 손길도 필요한 실정이다. 수학을 가르치는 최연정 선생님은 "한글과컴퓨터에서 기초적인 프로그램은 지원받았지만, 교육 관련 SW는 여전히 부족한 형편"이라며 "다른 교육용SW 업체들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보다 나은 교육환경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 뿐 아니라 이곳 교사들을 위한 컴퓨터 수업도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저작권자 © 블로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