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른바 '하드웨어 전문가'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하드웨어 분야를 함께 취재한 건 순전히 직장 환경 탓이었다. 이전에 몸담았던 곳이 주간지인지라, 혼자서 IT분야를 도맡아야 했다. 어쩔 수 없잖은가. 오지랖을 넓힐 수밖에. 하드디스크(HDD)에 대한 추억을 되짚을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니,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걸까.

2003년께였던가, '하드디스크, 가전과 랑데뷰'란 기사를 우연찮게 쓰게 됐다. 삼성전자에서 HDD를 저장장치로 채택한 '가제트'란 디지털 캠코더를 내놓은 게 기사를 기획하게 된 계기였다. 가제트를 불씨로 플래시 메모리 대신 HDD를 저장장치로 쓰는 가전이나 디지털 기기들이 하나둘 생겨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 HDD를 내장하고 있던 디지털 기기는 '아이팟'이 거의 유일했다. 지금이야 아이팟이 전세계 MP3P의 대명사로 자리잡았지만, 당시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아이리버가 세계 시장을 삼킬 때 아이팟의 위치는 고작 'HDD를 저장장치로 쓰는 특이한 MP3P' 정도였던 것 같다. 물론 내 경험상의 기억이 그랬다는 것이다.

당시 취재하면서 여러 업체를 찔러봤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우리 제품에 HDD를 굳이 내장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HDD는 휴대용 기기에 달기엔 안정성이 떨어졌다. 지금처럼 크기를 줄이는 기술도 부족했을 뿐더러 소형화 비용도 만만찮았다. HDD의 가격 자체도 지금보다 훨씬 비싸던 시절이었다. 기업들의 선택은 당연한 결과였다.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것도 지금 와서 보면 유쾌하기 그지없다. 6~7년전 소니가 내놓은 '마비카' 시리즈를 기억하는가. 플래시 메모리 대신 CD-RW를 달고 156MB 소형 CD를 저장장치로 채택한 디지털 카메라 말이다. 발상 자체는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러한가. 사진 한 장 찍으면 기다렸다는듯이 CD-RW가 '위이잉~' 소리를 내며 이미지를 저장했는데, 저장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툭하면 에러메시지를 띄우는통에 이용자들의 원성을 사곤 했다. 

플래시 메모리 용량이 커지고 값은 저렴해지면서 '마비카'는 한때 소니의 기발한 해프닝으로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누가 보더라도 대세는 이제 플래시 메모리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그런데 지금껏 숨죽이고 있던 HDD가 다시금 조용한 반란을 꿈꾸는 건 아닐까. '마비카 삽질'의 주역 소니가 이번에는 HDD를 내장한 디지털 HD 캠코더를 내놓았다. HDD 용량도 30~60GB로 늘어났다. 테이프처럼 별도의 변환과정을 거쳐야 하는 불편함도 없고, DVD보다 대용량의 저장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 좋다. 외국에선 성냥갑만 한 크기에 USB에 꽂아 쓰는 12GB 미니 HDD 저장장치도 나왔다고 한다. HDD의 인기가 날로 치솟는 분위기다.  

일화 하나. 앞서 말한 기사를 취재하던 즈음이었던가. 마감 중 가진 야식 시간에 김밥을 넘기던 후배가 뜬금없이 말했다.  

"형! 집에서 남아도는 HDD를 MP3 플레이어로 만들어주는 사업을 해보면 어떨까요?" 

"거, 무거워서 들고 다니겠어?" 

"뭐 어때요. 배낭에 넣고 다니면 되지. 크고 무겁긴 하겠지만, 싼 값에 엄청난 양의 MP3를 담을 수 있다면 충분히 시장에서 반응을 얻을 것 같은데요. 돈 없는 학생들이 좋아하지 않을까? 아이팟은 아직 비싸니까."

그때는 웃음으로 넘기고 말았지만, 그 뒤로 아이팟을 볼 때마다 그 후배의 깜찍한 발상이 떠올라 슬며시 미소짓곤 했다. 그 후배는 HDD MP3P를 포기하는 대신 아이팟을 손에 넣었고, 지금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유명 블로거가 됐다. 이래저래 HDD에 얽힌 기억들은 발칙하고도 유쾌하다.

하드디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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