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은 오랫동안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심장이었다. 1980년 5월의 기억은 한 세대의 이념을 바꿔 놓았고, 시민의 저항은 국가의 방향을 바로세웠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남은 그 땅은 산업화의 무대에서는 언제나 한 걸음 비켜 서 있었다.

철강은 포항으로, 화학은 울산으로, 기계는 대구로, 자동차는 창원으로 향했다. 국가의 자본과 정책, 인재가 동남으로 쏠릴 때 호남은 농업에 묶여 있었다. 민주화의 성지라는 자부심 뒤엔 산업화의 낙오라는 씁쓸한 현실이 따라붙었다.

이 기나긴 공백을 메우듯 SK그룹이 움직였다. '챗GPT' 개발사인 오픈AI와 손잡고 전남에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짓기로 한 것이다. 인공지능(AI) 산업의 심장이라 불리는 인프라가 호남에 들어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단순한 기업 투자 이상의 함의가 있다. 김영록 전남도지사는 이 소식을 두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든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SK가 전남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AI 핵심 인프라를 구축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조건이 두루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는 AI 연산의 물리적 엔진이다.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초단위로 학습과 추론을 반복하려면 막대한 전력과 냉각수, 그리고 초저지연 네트워크가 동시에 맞물려야 한다. 전력·냉각·통신망이 삼각축으로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난 반도체와 알고리즘이 있어도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전남은 매력적인 선택지다. 풍력과 태양광 비중이 높아 에너지 공급 여력이 크고 해안선을 따라 냉각수 확보도 수월하다. 연중 온도 변동이 적고 습도가 일정해 냉각 효율이 높다. 한전 본사가 위치한 나주가 있어 송전망 연결도 용이하다. 전력망·기후·지형이 맞물린 복합적 안정성이 바로 전남이 가진 강점이다.

SK는 해남 솔라시도 기업도시를 유력하게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태양광 발전 단지와 첨단 산업 인프라가 결합된 지속가능형 스마트시티 구상지다. 자체 전력 조달이 가능하고 대규모 부지확보가 용이할 뿐 아니라 재생에너지와 AI 인프라를 결합하려는 SK의 중장기 전략과도 맞아떨어진다.

정무적 계산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가 추진하는 AI 인프라 지역 분산 정책과 산업통상자원부의 AI-에너지 융복합 클러스터 구상과 방향이 SK의 행보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SK는 정책의 실질적인 파트너로서 정부의 균형 발전 구상에 동력을 보태고 전남도는 산업 개발의 명분을 확보한다. 산업과 정치가 서로의 이해를 교환하며 이익의 교차점을 찾아가는 구조다.

흥미로운 건 같은 날 삼성이 오픈AI와 손잡고 포항에 동남권 거점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는 점이다. SK가 전남을, 삼성이 경북 포항을 각각 선택하면서 재계 1·2위 기업이 동시에 한반도 서남과 동남에 오픈AI 협력형 데이터 인프라를 세우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겉으로 보면 두 그룹이 지역을 나눠 갖는 듯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보면 남부권 전역을 하나의 거대한 AI 산업벨트로 연결하는 시도이자 전력·통신·데이터를 분산 배치해 리스크를 줄이려는 전략적 분권의 일환이다. 산업과 지역, 국가 차원의 이해가 맞물리며 '한국형 스타게이트'의 지도가 드러나는 셈이다.

호남은 오랜 기간 산업화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었다. 데이터센터 한 곳이 모든 불균형을 바꾸진 못하겠지만, 산업의 방향은 결국 자본이 향하는 곳에서 결정된다.

태양과 바람이 전기를 만들고 바다가 냉각수를 품는 그곳에서 SK는 AI 산업의 새로운 심장을 세우고 있다. 민주주의의 시간 위에 기술의 시간이 차분히 덧입혀진다. SK의 선택은 그 비대칭을 교정하려는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그러나 가장 정치적인 결정이다. 정치가 하지 못한 일을 자본이 먼저 시작했다. 회복이자 늦은 균형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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