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미국과의 관세협상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상대적으로 잊혀지긴 했지만 한때 온 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이슈가 ‘산업재해’였다. 건설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건설사를 압박하고 심지어 건설 라이센스까지 말소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건설사들은 벌벌 떨어야했다.
현장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면 해당 사업장의 시공사가 어디인지 알려지고, 이후 해당 건설사의 주가가 급락하는 현상도 빈번했다. 인명 사고가 건설사의 기업가치에도 영향을 미치는 주요인이 된 것이다.
다만 건설 현장의 사고가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몇 년 전 SPC의 공장에서 노동자의 사망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언론뿐만 아니라 시민단체까지 나서 SPC를 비판한 것과는 차이가 크다.
더욱이 건설사들은 정권 초기 서슬 퍼런 칼날을 우려해 말을 아끼고 있지만 불만이 가득하다. 건설 현장을 100% 컨트롤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명사고를 완벽히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인명 사고 났다고 건설사의 라이센스를 말소하는 것은 지나치게 과도한 처사라는 항변도 나온다.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고 하지만 사망자 발생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려는 속내가 엿보인다.
건설 현장의 사고가 좀처럼 부각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 원인들이 있긴 하겠지만 일단 사고를 당한 이들의 상당수가 외국인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냉정히 말해 남의 나라 사람 죽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냉정함이 묻어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사고를 당한 노동자가 우리나라보다 국민소득이 현저히 떨어지는 저개발국가 출신이니 이 사람들의 목숨 값을 우리와 대등하게 보지 않는다는 인식도 근저에 깔려있다고 본다.
우리는 생명의 값어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인권의 가치가 몰라보게 올라가면서 이 같은 신념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조금만 달리 살펴봐도 이와는 다른 사례가 넘쳐난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대규모 테러가 발행한 이후 미국 정부는 9.11 희생자보상기금을 조성해 사망자들에게 보상금을 배분했다. 미국 의회는 희생자 가족의 경제적 손실과 비경제적 손실에 기초해 엄격한 보상금 지급 기준을 설정했다.
그 결과 은행가는 건물 관리인보다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고 노인보다는 젊은이들이 더 비싼 가격을 평가받았다. 희생자들 중 연봉 400만 달러 이상인 6명에게는 직계가족에게 640만 달러를 지급한 반면, 최저 가격의 희생자는 25만 달러를 받는데 그쳤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국가의 국민소득 수준에 따라 몸값도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지난 10일 1단계 휴전합의에 서명하면서 하마스가 보유한 인질 20명과 이스라엘이 보유한 팔레스타인 수감자 약 2000명을 맞바꾸기로 했다.
단순 비율만 봐도 이스라엘 포로와 팔레스타인 포로의 값어치가 100:1이다. 이스라엘의 1인당 GDP가 5만3372달러, 팔레스타인이 3663달러인 점을 감안하면 현실에서는 격차가 더 커진 셈이다.
예전보다 완화되긴 했지만 대한민국은 유독 개인보다는 조직과 단체,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코로나19 창궐 당시, 국민 개개인의 동선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이 침묵한 것은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동체에 들어가 있는 개인들은 대체로 평등한 대접을 받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별 성과에 따라 다른 대접을 하면 이에 반발하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하지만 이 같은 원칙이 적용되는 것은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는 '개인'들이다. 저개발국가에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한국 건설현장의 냉엄하지만 씁쓸한 현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