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들(Numbers)로 기업과 경제, 기술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숫자는 정보의 원천입니다. 정보는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숫자도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보는 눈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숫자 이야기를 <넘버스>로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사태는 반도체 업계에 엄청난 수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특히 가장 높은 매출 비중을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는 창사 후 유례없이 많은 돈을 번 2017~2018년에 이어 또 한 번의 ‘슈퍼사이클’이 시작됐다는 평을 얻고 있죠.

다만 제품별로 보면 수요공급 상황은 달랐습니다. D램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꾸준히 공급자 우위로 가격 상승세가 이어졌지만, 낸드는 공급 과잉으로 가격 내림세가 이어져 왔죠. 근데 최근 들어선 이 상관관계가 역전되고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모바일 시장 둔화 속 서버 제품을 중심으로 D램 가격 상승 추세가 가라앉고 있고, 반대로 낸드는 반등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실제로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최근 몇 달새 D램 업황에 대한 우려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주요 고객사들이 상반기 D램 재고를 큰 폭으로 확보했고, 이에 하반기엔 가격이 내려갈 수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그래서 D램 주요 제조업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난야테크놀로지의 상반기 실적 상황을 종합, 하반기를 예상해보려 합니다.
문제는 '재고'?
시작은 마이크론입니다. 세계 시장에서 지난 2분기 기준 D램 점유율 3위, 낸드 점유율 5위를 기록 중이죠. 2021회계연도 3분기(3~5월) 실적을 지난 6월 말에 발표했는데 매출 74억2200만 달러(8조5500억원)로 전년 동기(36.5%)와 전기(19.0%)를 모두 앞질렀습니다. 증권가 컨센서스 대비로도 매출과 주당순이익(EPS)이 모두 크게 높았는데, 실적 발표 다음 날 주가는 무려 6% 넘게 하락했습니다.

투자업계에서 우려한 건 수요처의 재고 축적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 불확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변수 앞에서 기업들이 혹여 생길지 모를 공급망 차질에 대응하기 위해 재고를 대규모로 축적한 걸 우리는 지난해 한 차례 배운 바 있습니다. 반도체 공급사들의 재고 수준이 크게 낮아졌음에도 선제적으로 재고를 쌓는 기업들의 전략적 결정 앞에선 하반기를 낙관하기 쉽지 않다는 게 우려의 주된 요인이었습니다.

마이크론은 2021회계연도 기준 캐팩스를 기존 90억 달러에서 95억 달러로 늘릴 것이라 발표했습니다. EUV 도입을 앞두고 투자를 늘린 것으로 해석되나, 시장은 증설에 따른 공급 증가를 우려했습니다. D램 비수기에 접어들면서 응용처별 일부 수요 감소가 현실화하고 있는 마당에 캐팩스 증가는 잠재적 공급 확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투자증권 리포트에 따르면 캐팩스 확대와 메모리 반도체 매출은 전반적으로 음의 상관관계를 띄었습니다.

▲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캐팩스를 늘린 뒤 수 년 내 메모리 반도체 판매는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자료=하이투자증권)
▲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캐팩스를 늘린 뒤 수 년 내 메모리 반도체 판매는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자료=하이투자증권)

이번엔 대만의 난야테크놀로지 실적입니다. 이 업체는 D램, 그중에서도 DDR3를 주력으로 팔고 있습니다. DDR5가 나오는 마당에 이미 십수년 전 나온 DDR3는 성숙 노드에 속하죠. 다만 가성비를 가진 범용 제품을 만드는 회사인 만큼 여전히 다양한 제품 응용처에 두루 사용되고 있습니다. 업계에선 이 회사를 ‘D램 풍향계’라고도 부릅니다.

월간 기준으로 지난 6월 난야의 매출은 76억3900만 대만달러(약 3150억원)로 전월과 거의 같았습니다. 증권가는 난야의 월간 매출 증가율에 주목했습니다. 지난 6월 매출이 전월 대비 0.46% 증가하는 데 그친 겁니다. 공교롭게도 난야의 월간 매출 증가율은 지난해 11월 이후 줄곧 큰 폭으로 상승하다가 8개월 만에 0%대에 근접한 상태입니다.

▲ 난야테크놀로지 매출은 2020년 11월부터 월간 기준으로 8분기 연속 증가했다. 다만 6월에는 증가율이 0%에 가까워졌다.(자료=하나금융투자)
▲ 난야테크놀로지 매출은 2020년 11월부터 월간 기준으로 8분기 연속 증가했다. 다만 6월에는 증가율이 0%에 가까워졌다.(자료=하나금융투자)

2분기 실적은 어땠을까요. 매출 226억3700만 대만 달러로 전 분기 대비 28% 증가했습니다. 생산량이 제한적인 가운데 제품 가격이 30%가량 상승한 덕분입니다. DDR3 D램이 오래된 덕에 공급 증가가 없었고, 이에 가성비가 요구되는 고객사들이 제품을 많이 구매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주목할 건 난야가 3분기 D램 출하량 가이던스로 한 자릿수 초반대 ‘감소’를 제시했다는 겁니다. 이건 수요가 줄어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재고 수준이 낮아 2분기처럼 많이 팔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가격은 이미 상당히 높아진 가운데 생산은 더 늘리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3분기 D램 가격 증가폭 줄겠지만...
최근엔 국내 메모리 제조사들이 실적을 발표했습니다. 먼저 이번엔 지난달 28일 실적을 발표한 SK하이닉스입니다. D램과 낸드에서 각각 점유율 기준 세계 2위인 하이닉스는 지난 2분기 매출 10조3000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증권가 컨센서스인 9조9000억원을 4000억원 뛰어넘었죠. D램과 낸드 출하가 각각 한 자릿수대 중반과 초반으로 판매 자체가 많았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SK하이닉스는 하반기 시장을 낙관하고 있습니다. D램 수요 성장률이 당초 20%에서 20%대 초반대로 높아졌다는 겁니다. SK하이닉스는 기업용 제품을 중심으로 한 PC시장 수요 강세가 이어지고 모바일에서도 고용량 채용 중심으로 수요 개선이 있을 것이라 내다보고 있습니다. 서버 시장도 기업들이 고용량 제품 중심으로 신규 데이터센터 투자를 지속할 것으로 언급했습니다.

▲ SK하이닉스 2세대 10나노급(1ynm) DDR5 D램.(사진=SK하이닉스)
▲ SK하이닉스 2세대 10나노급(1ynm) DDR5 D램.(사진=SK하이닉스)

잘 알려져 있다시피 SK하이닉스는 1α D램에서 EUV를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전반적 캐팩스 규모는 기존 수준을 유지했는데, 이는 기존 시설로 수요 확대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해석됩니다. 재고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면, 혹여 D램 시장에 수요가 낮아지더라도 201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치킨 게임’ 수준의 D램 업황 악화는 안 올 가능성이 커집니다.

마지막으로 삼성전자입니다. 2분기 반도체 사업부에서 매출 22조7400억원을 기록했는데 이는 전기 대비 19.6% 늘어난 수치입니다. 삼성전자는 종합반도체회사(IDM)인 만큼 공시 없인 정확한 메모리 반도체 실적을 확인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1분기 반도체 사업부 내 메모리 비중이 75% 수준이었던 걸 감안하면 2분기엔 대략 17조원 이상 거뒀을 것으로 보입니다.

▲ 반도체 공정에 EUV를 적용한 삼성전자 경기도 평택캠퍼스 항공사진.(사진=삼성전자)
▲ 반도체 공정에 EUV를 적용한 삼성전자 경기도 평택캠퍼스 항공사진.(사진=삼성전자)

삼성전자 또한 하반기 서버 업체들의 메모리 재고 조정에 따른 실적 하락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의 D램과 낸드 모두 재고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하반기에도 응용처 전반에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지속될 것이란 겁니다. 삼성전자는 2분기 D램의 빗그로스(생산량 증가)가 10%였고 3분기에도 한 자릿수대 초반으로 수요 빗그로스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15나노미터 D램에 EUV를 일부 도입한 데 이어 14나노미터 D램에 본격적으로 EUV를 적용한다고 밝혔습니다. 관련해 주목할 건 원가 경쟁력인데요. 이미 1개 레이어에 EUV를 적용한 D램에서 전체 공정 수가 줄어 이미 기존 대비 원가가 더 나았다고 강조했습니다. 14나노 D램에는 5개 레이어에 EUV를 적용하는 만큼 원가 감소폭은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게 삼성전자 측 설명입니다.

▲ D램 현물가격과 고정거래가격은 2021년 들어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자료=한화투자증권)
▲ D램 현물가격과 고정거래가격은 2021년 들어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자료=한화투자증권)

2018년 '치킨게임' 반복은 없다

4사의 2분기 실적 발표에서 전반적인 흐름을 보면, D램 업황이 꺾일 수 있다는 시장의 우려에 비해 제조사들은 생각보다 걱정이 크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2분기 대비 3분기에 D램 가격 상승세가 꺾일 것은 확실해 보이나 이는 상대적으로 2분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것일 뿐이며, 그보단 코로나19에 따른 전지구적 트렌드 변화로 인한 거대한 반도체 수요 증가 효과가 더 클 것이란 게 제조사들의 생각입니다.

중장기적으로 반도체 업계 증설로 인한 공급 과잉이 일어날지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투자 중 상당액이 EUV로 대표되는 선단 공정을 도입하는 데 치중돼있어 공급량 증가까지 이어지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술적으로 DDR5에 ECC가 내장되면서 칩 부피가 커지는 것도 공급 증가를 제약할 수 있는 요인입니다.

무엇보다도 현재 반도체 공급사의 재고는 극도로 낮은 가운데서도 반도체 제조사들은 과거와 같은 성급한 증설을 벌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언급하진 않았지만 낸드도 2020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가격 감소세에서 빠져나와 반등이 예고돼 있고요. D램 업황이 현재와 달리 공급자 우위에서 빠져나오더라도 2018년 후반부터 2019년까지 이어진 급격한 D램 가격 하락에 따른 경착륙보단 연착륙이 예상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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