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감독원이 '벨기에펀드' 투자 피해와 관련해 소비자보호 행보에 나섰다. 이찬진 금감원장은 피해자들과 직접 만난 뒤 "현장검사 결과 불완전판매나 내부통제 위반이 확인되면 이미 처리된 건을 포함해 모든 분쟁민원의 배상 기준을 재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는 피해자보호 의지로 읽힐 수 있지만 발언 시점과 방식, 뉘앙스가 시장에 다른 신호를 남겼다.
특히 '이미 처리된 민원까지 다시 조정할 수 있다'는 언급과 관련해 논란이 일고 있다. 금융 분쟁조정 절차의 경우 민원 접수와 별개로 조사·소명·심의를 거친 뒤 분쟁조정위원회가 최종 결론을 내린다. 조정이 성립돼 조정조서가 작성되면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부여된다. 다시 다툴 수 없는 구속력이 발생한다는 의미다.
소비자와 금융회사 모두 이 확정력을 전제로 분쟁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이 원장의 메시지는 조정조서의 법적 안정성과 분조위의 독립성을 동시에 훼손할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발언이 더 큰 반향을 일으킨 배경은 취임 이후 이 원장이 여러 사안에서 강경 모드를 견지해온 데 있다. 그는 소비자보호 결의대회에서 "금융소비자보호 책임을 저버리는 금융회사는 과징금·영업정지 등 강력한 제재 수단을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대한 행사해 언제든 퇴출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새마을금고 감독권에 대한 논란에서는 3분의1을 통폐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내놓으며 특정 금융기관의 존립을 거론했다. 이에 금융권에서는 "당국 수장의 발언이 법(절차)보다 앞서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쓴소리가 나온다.
벨기에펀드를 향한 이 원장의 한마디에 금융권이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도 이와 상통한다. 금감원장이 '배상 기준을 다시 조정하라'고 하면 판매사 입장에서는 사실상 강제에 가깝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종결된 분쟁까지 재개될 수 있다고 읽히는 메시지는 리스크 관리 조직에 직접적인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 발언 이후 여러 금융사는 내부적으로 유사구조 상품의 리스크를 다시 점검하고 판매정책이나 검토 기준을 조정하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일부 조직에서는 민원 가능성을 주요 변수로 고려하는 논의가 이뤄졌다. 금융당국은 원론적 표현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만, 시장은 이를 선제판정 신호로 해석하며 경계 강도를 높인 셈이다.
일찌감치 금융사들은 반복적인 불완전판매 사태를 겪으며 자율조정 기능을 구축해왔다. 라임 사태와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손실 이후 자율배상기구가 상시화됐고 고위험 상품에는 50~80% 수준의 자율배상이 이뤄졌다.
상품 심의 과정에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한편 고객의 이해 여부 확인과 핵심 위험 고지 절차도 강화됐다. 설명자료 보완과 위험 항목 별도고지 등은 당국의 강제가 아닌 시장의 학습효과에 따른 것이다.
해외 금융감독기관의 관행은 이와 대조적으로 역할분담과 절차적 독립성을 전제로 한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조사 중인 기업에 대한 정보공개를 예외적 상황으로 제한한다. 나아가 개별 사안 조사·심의 이전에 금융감독기관장의 판단성 발언을 자제한다.
이는 절차의 독립성과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다. 결과적으로 금융감독기관의 역할은 제도·기준·사후평가에 집중되고 개별 사건에 대한 판단은 독립적인 심의기구가 담당하게 된다. 한국식 '현장 발언 중심의 감독'은 제도와 심의를 분리하는 글로벌 규제방식과 거리가 있다.
금융소비자보호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분쟁조정 절차의 일관성이 전제돼야 한다. 분조위는 판단과 사례 축적 등으로 금융사와 소비자 모두에게 기준점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금감원장의 발언이 이 기준을 뛰어넘는 신호로 여겨지면 사실관계 확인보다 발언에 대한 해석이 선행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금융사와 당국은 분업구조를 이룬다. 금융사는 상품설계와 내부통제를 담당하는 1차 조정자이며 당국은 그 과정이 공정했는지를 사후에 판별하는 2차 판정자다. 결론이 나지 않은 사건에서 금감원이 방향을 먼저 제시하면 시장의 자율교정 기능은 약화되고 모든 리스크는 금융사에 되돌아온다. 소비자보호와 시장자율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원장은 직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