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와 ‘AI 동맹’으로 GPU 26만장 확보
정치권력 ‘병풍’ 탈피 대중들과 소통 ‘새모습’
“AI시대 기술 넘어 공감 커뮤니케이션 중요”

지난주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74%가 ‘도움이 됐다’고 답했습니다. 한·미 관세협상 전격 타결, 핵추진 잠수함 건조 합의, 26만 장 규모의 엔비디아 GPU(그래픽카드) 확보 등이 APEC 정상회의의 대표적 성과로 꼽히지만 국민의 기억에 남은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치맥(치킨+맥주) 회동’입니다. 국민의 다수가 APEC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데에는 짧은 영화 같았던 세 사람의 회동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창업 초기 용산 전자상가를 직접 찾아다니며 영업했던 젠슨 황 CEO는 15년 만에 한국을 방문해 지난달 30일 서울 삼성동 ‘깐부치킨’ 매장에서 이재용·정의선 회장과 만찬을 함께했습니다. 세 사람은 우정을 다지는 ‘러브샷’을 했고, 옆자리에 있던 손님이 건넨 소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골든벨’을 울려 그날의 180만 원 식사비를 모두 계산한 이재용 회장은 “살아보니까 행복이라는 게 별것 없어요. 좋은 사람들끼리 맛있는 거 먹고 한잔하는 게 행복이에요”라는 평범하지만 인상 깊은 말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깐부치킨 회동 후 자리를 옮겨 엔비디아 그래픽카드 ‘지포스’ 25주년 행사에 참석해 함께 무대에 섰습니다. 이재용 회장은 “왜 이렇게 아이폰이 많아요?”라며 농담을 건넨 뒤 “젠슨 황은 이 시대 최고의 이노베이터, 존경하는 경영자이자 인간적이고 매력적인 친구”라고 치켜세웠습니다. 정의선 회장은 “생긴 건 제가 나이가 들어 보여도 두 분이 모두 형님”이라며 웃음을 자아냈고, “미래에는 엔비디아 칩이 자동차 안으로 들어와 더 많이 협력할 것이며, 앞으로 자동차에서도 더 많은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영화 같았던 세 리더의 ‘치맥 회동’

이날 젠슨 황 CEO와 이재용·정의선 회장의 치맥 회동은 단순한 만찬이 아니라 엔비디아·삼성전자·현대차의 ‘AI 동맹’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APEC CEO 서밋’ 의장을 맡아 이재명 대통령과 함께 경주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끈 최태원 SK그룹 회장까지 포함하면 이는 엔비디아·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로 이어지는 ‘한국형 AI 동맹’의 상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오일 등 에너지 자원 확보가 세계 경제 패권을 좌우했지만 지금은 반도체와 GPU가 새로운 전략자산으로 떠올랐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5만 장의 GPU 확보를 공약했는데 15년 만에 방한한 젠슨 황은 무려 26만 장을 약속했습니다. 이 정도 규모라면 대한민국이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대 AI 강국으로 도약하는 기반이 됩니다.

그렇다면 젠슨 황은 왜 GPU 26만 장을 대한민국에 공급하겠다고 약속했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탄탄한 AI 동맹을 구축하기 위해서이며 동시에 선택지가 한국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구글과 오픈AI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엔비디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AI칩 자체 개발에 나섰고, 트럼프 대통령의 규제로 중국과의 거래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젠슨 황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파트너는 대한민국뿐입니다.

대한민국만큼 제조업 포트폴리오가 균형 잡힌 나라는 중국을 제외하면 없습니다. 젠슨 황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를 파트너로 택한 이유는 피지컬 AI를 실현할 수 있는 제조 인프라를 유일하게 갖춘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인텔과 함께 GPU에 필수적인 고성능 HBM 메모리를 공급하는 세계 유일의 기업이며, 현대차는 완성차와 로보틱스 협력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업입니다. 결국 엔비디아는 대한민국을 피지컬 AI의 시험장으로, 차세대 AI 구현의 핵심 파트너로 선택한 것입니다. 젠슨 황이 GPU 26만 장을 ‘괜히’ 주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젠슨 황은 왜 GPU 26만 장을 약속했나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GPU 26만 장 도입을 계기로 제조업 쇠락을 극복할 수 있는 다시없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대한민국 제조업 부활의 시간이 열린 것입니다. 최태원 회장이 말한 것처럼 우리 기업들은 AI 팩토리를 통해 제조 혁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는 엔비디아 GPU와 플랫폼을 활용해 반도체 및 자동차 제조를 완전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엔비디아·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가 글로벌 AI 동맹을 맺는다면 흔히 하듯이 회의실에서 만나 악수하고 사진을 찍으면 될 텐데 왜 대중적인 치킨집에서 수많은 사람 앞에서 소맥과 폭탄주를 마시며 러브샷을 했을까요?

젠슨 황은 GPU가 단순히 게임용이 아니라 AI 슈퍼컴퓨팅 클라우드 자율주행 등으로 확장된다는 비전을 창업 초기부터 제시해 조직 전체에 공유하고 공감대를 형성한 탁월한 기술 리더입니다. 동시에 대중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신뢰를 쌓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춘 경영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번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를 방문할 때마다 현지 음식을 즐기고 시민들과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주는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지난해 5월에도 대만을 방문해 TSMC의 모리스 창 창업자 등과 만나 야시장에서 어울려 식사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공개됐습니다. 대중은 젠슨 황의 이런 친근하고 인간적인 소통에 열광합니다.

15년 만의 서울 방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열광했고 젠슨 황뿐 아니라 이재용·정의선 회장에게도 이름을 연호하며 환호했습니다. 현장은 마치 정치 집회를 방불케 했고, 이재용·정의선 회장도 분위기에 맞춰 농담을 던지는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번에 이재용·정의선 회장의 대중적 리더십을 확인한 것은 큰 소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민들이 이재용·정의선에 열광한 이유

대한민국 재계 총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체로 법원이나 검찰청 앞에 서서 굳은 표정으로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고 말하는 우울한 장면입니다. 이재용 회장이 그랬고, 최태원 회장이 그랬으며, 현대차그룹도 정몽구 명예회장 시절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또는 정치권력자의 뒤에 서서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함께 먹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2023년 12월 초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 직후 윤석열 대통령이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이재용 회장 등 재계 총수들을 부산 깡통시장으로 불러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빈대떡을 함께 먹게 했던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검찰청과 법원을 오가거나 정치권력자의 뒤에서 병풍 역할이나 했던 기업 총수가 세계 1위 시가총액을 자랑하는 글로벌 대표 AI 기업 창업자와 만나 GPU 26만 장 확보라는 엄청난 성과를 올리고, 치맥을 즐기며 웃고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대중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이는 대한민국 재계 역사에 오래 남을 명장면이며 이재용·정의선 회장이 가장 빛났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입장에서도 굳이 말하자면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광고효과를 거뒀습니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AI 시대는 전혀 다른 리더십을 요구합니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 능력, 사람 중심의 공감 리더십, 데이터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이터 리터러시, 그리고 윤리적 책임 경영이 그것입니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지나치게 속도와 결과 지향적이고 강하고 단호한 이미지의 리더이긴 하지만 비교적 AI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을 잘 갖춘 인물이라는 평입니다.

 

검찰에나 불려 다니던 총수의 ‘반전’

이재용 삼성 회장은 반도체, AI, 6G 등 미래 기술 투자를 강조하며 기술 초격차와 인재 중심 경영을 늘 이야기합니다. 그는 현장 중심 소통을 중시해 공장과 연구소를 방문하고 협력사와 만나며 젊은 엔지니어들과 간담회를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중과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거의 없습니다. 기자회견이나 연설, 인터뷰도 드뭅니다. 올해 초 부사장 이하 2000여 명의 임원을 대상으로 한 ‘삼성다움 복원 교육’조차 직접 나서지 않고 영상으로 대신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AI, 자율주행, 로보틱스 등 미래 모빌리티 비전을 명확히 제시하며 기술 리더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CES와 해외 모터쇼에서도 직접 연설하며 파괴적 혁신과 스타트업형 조직문화를 강조해 보수적이던 현대차 문화를 크게 바꿨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재용 회장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낫다는 평을 듣지만 수직적 조직문화의 한계 속에서 인간적인 스토리와 공감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재용·정의선 회장은 모두 AI 시대의 핵심 덕목인 기술 비전에서는 세계적 수준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기술 못지않게 사람 중심의 공감과 신뢰가 중요합니다. 신뢰는 내부 구성원과 협력사, 소비자, 그리고 사회 전체가 리더의 생각과 메시지를 직접 들을 때 형성됩니다. 이재용·정의선 회장은 기술 비전은 충분하지만 언어로 전달되는 공감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젠슨 황에게서 배우고, 최태원 SK 회장의 소통 방식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년 2등’ SK하이닉스가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회사로 도약한 것은 단순한 기술력 때문이 아닙니다. 개방과 토론, 협업의 문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협업과 분업을 통한 상생의 생태계를 조성한 결과입니다. TSMC가 난공불락의 파운드리 1위 자리를 지켜온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이재용·정의선이 젠슨 황에게 배워야 할 것

이재용 삼성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최태원 SK 회장과 함께 GPU 26만 장 확보라는 대한민국 경제사에 길이 남을 성과를 거뒀습니다. 동시에 세계적 기술 리더이자 대중 소통의 달인인 젠슨 황 CEO와의 치맥 회동을 통해 리더로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스마트폰과 반도체, 인공지능 자동차도 중요합니다.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주가를 끌어올리는 것 역시 투자자들이 간절히 바라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소비자와 투자자, 일반 대중은 이재용·정의선 회장이 더 자주 자신들의 눈높이에서 소통하고 메시지를 전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깐부치킨 매장과 지포스 25주년 행사장에서 시민들이 두 사람의 이름을 연호하고 환영한 것도 바로 이런 바람이 드러난 결과입니다. 이재용·정의선 회장은 이번에 젠슨 황 CEO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느끼고 깨달은 것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대중과의 소통이 어색하고 어렵더라도 이제는 나서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AI 시대를 이끌어가는 기술 리더로서 두 사람에게는 기술 이상의 ‘공감과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줄 책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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